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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축구 강국별 최고의 선수

축구 강국별 최고의 선수

*단순 해당 나라에서 올타임 순위가 높다고 뽑는게 아닌, 대표팀 활약을 우선으로 평가했습니다.

*주의사항

1. 각자만의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그거에 따른 결과는 당연히 판이합니다.
2. 역시 1번만의 이유가 있기에 필자도 독자를 비난할 수 없고, 독자도 필자를 비난 못 합니다.
3. 제대로된 논리를 기반으로한 건설적인 의견 제시 or 설득은 두 팔 벌려 환영입니다.
4. 엄청 꽉 막히지는 않았지만 되도록이면 생각했던걸 잘 바꾸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런 평가들 한해서만입니다.
5. 옛날 선수일수록 수상경력이나 공격포인트가 현역 선수에 비해 불리합니다.
6. 제 논리가 사실이 아닌 부분이나 부실함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7. 컴퓨터 전용글이어서 핸드폰으로 읽기엔 글이 다소 어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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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Der Kaiser" - 황제

프란츠 베켄바우어 (Franz Beckenbauer) [CB]

1945년 9월 11일 / 181cm 75kg

서독 대표팀 (1965년 ~ 1977년) 103경기 14골 10어시스트
바이에른 뮌헨 (1964년 ~ 1977년) 620경기 74골 75어시스트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자, 서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불리는 사나이다. 디 만샤프트와 바이언의 품에서 우승할 수 있는 트로피는 싹 다 들어 올리고 1972, 1976 발롱도르도 수상했다. 1960년대에는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 세계 최고를 찍었는데, 당시 서독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헬무트 쇤 감독이 베켄바우어에게 진정한 리베로의 의미인 '자유'의 중점을 두어 그를 리베로로 정착시키며 전 세계 최고가 아닌 역대 최고로 군림하게 됐다. 수비수임에도 화려한 드리블, 공격가담, 볼 운반, 패스, 슈팅 모두 탁월했다.


"그 누구도 프란츠를 제칠 수 없었다." - 게르트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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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Revolutionary" - 혁명가

요한 크루이프 (Johan Cruyff) [CF]

1947년 4월 25일 / 180cm 78kg

네덜란드 대표팀 (1966년 ~ 1977년) 48경기 38골 33어시스트
AFC 아약스 (1964년 ~ 1973년) 276경기 219골 161어시스트
FC 바르셀로나 (1973년 ~ 1978년) 182경기 63골 12어시스트

유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1970년대를 베켄바우어와 양분했다. 그는 미헬스 감독 밑에서 완벽한 토탈 풋볼플레이어가 되어 역대 최고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 토탈 풋볼은 당시까지의 장구한 축구 역사의 패러다임을 180도 바꿔버린 전술이었다. 선수 전체가 하나가 되어 공격, 수비 모두 같이 행했던 축구를 뜻하는데, 크루이프는 이 개념을 완전히 이해해 유럽을 평정했다. 아약스에서 유러피언 컵 3연패와 함께 1971 1973 1974 발롱도르 수상을 한다. 그 후에 바르셀로나에 와서 바르셀로나의 팀 기조를 바꾼다. 그의 하이라이트인 1974 서독 월드컵에서 크루이프는 가히 대회 최고의 선수라 불릴만했고 팀을 결승에 진출시켰지만 운명에 장난일까 베켄바우어의 서독을 만났고 크루이프는 서독의 풀백인 베르티 포그츠에게 완전히 지워지며 우승을 내주지만, 그가 대회 내 최고의 선수라 불릴만한 것은 당연하다. 그를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부르기에는 부적절하지만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선수라 부르기에는 적절하다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와 같은 선수를 한번도 본 적 없다. 그는 빠르고 기술적이며 팀의 리더였다. 거의 그가 팀의 감독인 것 같았다." - 단테 미르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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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어시스트가 집계되지 않음

이탈리아

"Fantazista" - 최초의 판타지스타

주세페 메아차 (Giuseppe Meazza) [CF]

1910년 8월 23일 / 169cm 73kg

이탈리아 대표팀 (1930년 ~ 1939년) 53경기 33골
인테르 (1927년 ~ 1940년) 409경기 284골

디 스테파노의 등장 이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으며, 인테르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다. 별명 그대로 최초의 판타지스타였다. 할 줄 아는 게 굉장히 다양했으며, 테크닉이 매우 훌륭해서 상대 수비수를 항상 농락했다. 현대에 호나우두가 자주 하던 골키퍼를 제치고 골을 넣는 것을 굉장히 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빼어난 양발을 이용해 탁월한 슈팅력과 찬스 메이킹은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그의 터닝 슈팅은 골키퍼가 공포를 느꼈다한다. 1934 이탈리아,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우승을 거두며 최초의 월드컵 2연패를 거두며 전 세계의 이탈리아의 위대함을 각인시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기술적인 선수들과 대등히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인." - 자니 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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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PASS MASTER" - 패스 마스터

차비 에르난데스 (Xavi Hernandez) [CM]

1980년 1월 25일 / 170cm 68kg

스페인 대표팀 (2000년 ~ 2014년) 133경기 12골 25어시스트
카탈루냐 대표팀 (1998년 ~ 2014년) 12경기 2골
FC 바르셀로나 (1999년 ~ 2015년) 767경기 85골 185어시스트

스페인과 바르셀로나를 빛낸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이자, 아르마다 군단의 핵심 OF 핵심이었다. 광활한 시야와 컴퓨터 같은 정확한 패스로 다양한 구질의 패스를 선보였으며 단순 후방 플레이메이킹뿐만 아니라 2선에서 뿌려대는 킬러패스는 "저 길을 봐?"라는 놀라움이 절로 나왔다. 그는 스페인과 FC 바르셀로나의 전무후무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했다. 이런 능력으로 그가 속해있던 바르셀로나는 2번의 트레블을 달성하며 21세기 최고의 클럽팀이 되었고, 스페인은 전무후무한 메이저 3연패를 이루며 21세기 최고의 국가대표팀이 되었다. 사실상 2010 발롱도르 수상의 적격자였다.

(장지현 해설위원 : "차비는 만약 감독이 주문만 하면 훨씬 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패스도 실수 없이 정확히 해낼 것이다." 차비와 피를로를 비교하는 유튜브 영상 中)

"차비의 눈이 리그 우승을 결정한다." - 마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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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어시스트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음

프랑스

"Le Roi" - 황제

미셸 플라티니 (Michel Platini)

1955년 6월 21일 / 179cm 74kg

프랑스 대표팀 (1976년 ~ 1987년) 72경기 41골 17어시스트
유벤투스 (1982년 ~ 1987년) 223경기 104골 49어시스트

레몽 코파 이후 무너졌던 뢰 블레의 자존심을 한껏 끌어올린 사나이이다. 미드필더임에도 압도적인 득점력을 겸비해 공격수 뺨치는 득점력과 함께 환상적인 오프더볼로 상대를 무력화시켰다. 전술안도 뛰어나, 당시 자신의 은사인 트라파토니 감독과 "조나 미스타"를 구현하며 유럽과 80년대 극강이었던 세리에 A를 지배했다. 그의 하이라이트인 유로 1984 때는 5경기에서 xG값이 3골인데도 비웃듯이 9골을 때려박으며 프랑스에게는 우승컵, 자신은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그리고 이 하드캐리는 아직까지 축구 역사상 단일 대회 하드캐리 순위에 밥먹듯이 랭크된다.

"미셸과 비교받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영광이다. 플라티니의 뒤를 잇는 것은 나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다. 플라티니는 한 사람밖에 없다." - 지네딘 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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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어시스트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음

잉글랜드

"Conductor on the Ground" – 그라운드 위의 노동자

보비 찰튼 (Bobby Charlton) [AM]

1937년 10월 11일 / 175cm 77kg

잉글랜드 대표팀 (1958년 ~ 1970년) 106경기 49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56년 ~ 1973년) 689경기 233골 10어시스트

1960년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리는 사나이다. 역대 축구사에서 가장 퍼펙트한 양발을 보유해, 패스와 드리블을 통한 절륜한 플레이메이킹을 보여줬다. 또, 그의 별명답게 미친 활동량과 수비가담으로 몸싸움, 태클 등 희생적인 플레이를 했다. 그는 뮌헨 참사로 인해 무너진 맨유를 되살렸고, 맷 버스비 감독 밑에서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와 '골든볼 트리오'를 이루며 유러피언 컵 우승까지 이룬다. 대표팀에서도 그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종주국임에도 이렇다 할 국제대회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던 잉글랜드에게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선물하며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영웅이 되었다. 그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예시가 있는데, 1970 멕시코 월드컵 8강에서 베켄바우어는 찰튼의 마크맨이었다. 베켄바우어의 공격 재능을 찰튼의 존재로 억제함으로써 경기를 2:0으로 리드하고 있는 도중, 알프 램지 감독은 찰튼을 체력 안배의 이유로 교체 아웃시킨다. 베켄바우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숨겨져 있던 공격 재능을 맘껏 발휘해 잉글랜드는 결국 역전패를 당한다. 역대 최고의 수비수인 베켄바우어를 고작 존재의 이유로 묶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속 구단은 물론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를 지향하는 누구에게나 위대한 본보기가 되는 선수다." - 알렉스 퍼거슨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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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어시스트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음

포르투갈

"O Pantera Negra" - 흑표범

에우제비우 (Eusebio) [CF]

1942년 1월 25일 / 175cm 76kg

포르투갈 대표팀 (1961년 ~ 1973년) 64경기 41골 2어시스트
SL 벤피카 (1961년 ~ 1975년) 715경기 727골

1965년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1960년대를 빛낸 선수 중 한 명으로 데뷔 초부터 천재 두각을 드러내 바로 주전이 된다. 그 후로 벤피카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며 15시즌 간 프리메이라 리가 11회 우승, 유러피언 컵 1회, 3회 준우승 등 처진 스트라이커임에도 미친 득점력을 뽐내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말 그대로 국내는 가지고 놀면서 유럽과 전 세계를 휘저었다는 것이다. 역시 에우제비우 하면 대표팀 커리어를 언급 안 할 수가 없는데,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에우제비우와 포르투갈이 참가한 첫 월드컵에서 에우제비우의 역대급 캐리로 8강 진출을 하지만, 상대는 북한이었다. 전반 25분 만에 북한에게 3골을 내주며 탈락할뻔하지만, 에우제비우의 전반 2골, 후반 2골 총 4골, 즉 포트트릭으로 4:3으로 역전시켰고 결국 5:3으로 역전 승리를 하며 4강 진출하고 탈락했다. 하지만, 소파스코어는 1966년 당시 에우제비우가 보여준 활약상을 통해 평점을 8.8점으로 매기며 대회 최고의 선수로 선정했다.

"에우제비우는 현역 시절 포르투갈 축구 그 자체일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것은 아직도 안타깝다. 그와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뛰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자주 생각한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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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어시스트가 집계되지 않음

우루과이

"Mago Del Sol" - 태양의 마법사

엑토르 스카로네 (Héctor Scarone) [CF]

1898년 11월 26일 / 171cm 73kg

우루과이 대표팀 (1917년 ~ 1932년) 51경기 31골
클루브 나시오날 (1916년 ~1926년, 1927년 ~ 1931년) ???골 ???도움

우루과이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우루과이의 대표 선수로 불린다. 당시 지금의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처진 공격수 자리인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필요한 덕목을 모두 갖췄다. 매년 훌륭한 득점력으로 경기당 득점 수가 거의 같았다고 한다. 나시오날에게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를 포함해 22개의 우승 트로피를 선물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거론된다. 스카로네하면 코파 아메리카인데, 1917 코파 아메리카에서 득점왕, MVP를 수상하며 조국에게 트로피를 갖다 주며 총 4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30 우루과이 월드컵 우승 포함 두 번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다.

"저는 나시오날과 대표팀에서 뛰기 위해 다시 우루과이로 돌아왔어요." - 엑토르 스카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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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Football Demon" - 축구 괴물

리오넬 메시 (Lionel Messi) [CF]

1987년 6월 24일 / 170cm 67kg

아르헨티나 대표팀 (2005 ~ ) 180경기 106골 56어시스트
FC 바르셀로나 (2004 ~ 2021) 778경기 672골 303어시스트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21세기 선수 중 유일하게 펠레와 마라도나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자로,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다. 메시의 능력은 말도 안 되는데, 압도적인 시야로 2.5선까지 내려가 볼을 풀며 반대전환킥 혹은 공격수에게 킬러패스를 뿌리는 것은 물론 특유에 깔끔하고 절묘한 왼발 슈팅으로 득점을 성공시켰다. 여기까진 메시가 베테랑이고 30살이 넘어가면서 신체적인 노쇠화가 됐을 때이고 전성기 때는 패스고 뭐고 본인이 3, 4, 5, 6명씩 뚫어가며 압박하는 상대 공격진, 미드진, 수비진, 골키퍼까지 제치며 득점한 골이 태반이다. FC 바르셀로나에서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은 메시는 1050 공격포인트라는 미친 기록도 생산하며 FC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는 당연하다. FC 바르셀로나는 메시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메시는 블라우그라나의 자존심이자 상징 그 자체이며 더 나아가 아마 축구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그는 트레블 두 번을 포함해 바르셀로나에게 35개의 트로피를 선물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조국을 결승까지 진출시키는데 공헌을 했지만 결승전 침묵하며 쓸쓸히 퇴장했다. 이후로도 코파 아메리카에 계속 도전했지만 역시 계속 준우승에 멈추며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모든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메시를 만류했고 결국 메시는 해당 발언을 번복한다. 하지만 메시에게 기회는 없는 것일까? 2018 러시아 월드컵 16강에서 탈락한다. 근데 오히려 메시는 월드컵 우승 트로피가 없다면, 은퇴도 없다 선언한다. 2019 코파 아메리카를 맞이하지만, 역시나 탈락을 하며 브라질을 위한 부패의 대회였다며 추한 발언을 하며 맞이한 다음 2021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결국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7경기 4골 5도움이라는 '메시 급' 스탯을 보여주며 드디어 우승한다. 그리고... 가능성을 본 메시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강팀들을 하나하나 꺾으며 축구 역사상 최고의 하드캐리에 들어갈만한 활약을 하며 결국 우승해낸다. 이렇게 축구의 신이 되고야 만다.

"확실한 건 모든 선수가 메시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이다." - 티에리 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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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어시스트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음

브라질

"O Rei do Futebol" - 축구 황제

펠레 (Pele)

1940년 10월 23일 / 173cm 75kg

브라질 대표팀 (1957년 ~ 1971년) 92경기 77골 38도움
산투스 (1956년 ~ 1974년) 657경기 644골 (불확실 / 공식전만 포함)
통산 (1956년 ~ 1977년) *1363경기 1279골

자타공인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이자,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 플레이메이커이며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공격수로서 모든 덕목에서 소위 말해 GOAT였다. 그의 기량을 쉽게 알려면, 앞서 서술한 메시의 능력 + 헤더, 인간이길 초월한 바디 밸런스를 갖고 있다 생각하면 된다. 1950년대 전으로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잡고 있던 세계 축구의 패권을 펠레의 등장 이후 브라질로 갖고 온다. 그는 주립 리그, 전국 리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티콘티넨탈컵 등등 모두 우승시키며 산투스를 최정상에 올려놓는다. 그는 이미 메시와 동급인 클럽 커리어지만, 그가 더 위대한 이유는 브라질 국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며 브라질 축구계를 쥐고 있던 일명 카르톨라스가 군부에게 정치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클럽팀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걷어들였다. 특히 펠레가 속해있던 산투스는 그의 엄청난 계약금을 충당하기 위해 공식전, 비공식전을 병행하며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정들을 소화해 냈다. 심지어는 남미판 챔피언스리그라 불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까지 빠져가며 돈이 되는 친선전을 미친 듯이 돌려며 리그 일정까지 빼면서 펠레의 커리어 중후반부는 국가의 안정을 찾지 못하며 축구, 사회, 경제가 모두 불안정했다. 만약 이 일이 없었다면, 펠레는 커리어 초중반보다 훨씬 나은 커리어를 가졌을 거라 모든 기록이 말하고 있다. 또, 메시가 2012년 69경기 91골로 한 해 최다 득점 기록을 갖고 있다 알려져 있는데, 1959년 펠레는 모든 경기, 1부 리그 팀 상대로 101경기 120골을 뽑아냈다. 메시의 69경기도 혹사 중에 혹사인데 펠레의 경기 수가 세 자리인 거부터 당시 펠레의 신체적 위대함과 위상을 알 수 있다.

펠레는 역시 국가대표 커리어인데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골, 최연소 결승전 골, 최연소 해트트릭 등 시작부터 남다른 활약을 보여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을 손쉽게 우승시켜버린다. 1962 칠레 월드컵은 조별리그까지만 활약하고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사실상 가린샤의 하드캐리로 우승한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은 그의 신체적 전성기임에도 펠레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온갖 비매너 플레이와 개태클이 난무하는 시대였고 펠레도 피해자였기에 부상으로 결장한다. 그리고 맞이한 다음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국가대표팀인 '1970 브라질'에 사령관이었고 훌륭한 플레이메이킹을 바탕으로 가히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해당 월드컵에서 단 1경기를 빼고 결승전 포함 전경기 4득점 이상을 뽑아내며 쉽게 월드컵 우승을 하며 아직도 축구 역사상 최고의 단일대회 하드캐리에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랭크된다.

펠레는 당시 퍼져있던 세계 축구를 자신에게 몰입시켰고 17세의 나이로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두는데 1등 공신을 하며 '황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산투스 FC에서 믿을 수 없는 활약을 펼치며 '독보적인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장구한 축구사에서 역사에 남을 하드캐리를 보여주며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황제'로 등극한다. 19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으로 선정했다. 마이클 조던, 무하마드 알리, 베이브 루스같이 자신들의 스포츠에서 GOAT라 불리는 이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선정한 저 기록은 21세기로 통용되어도 달라지지 않는 선정이 된다.

"안녕하세요 펠레씨. 제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입니다.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펠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 로널드 레이건


*펠레 통산 득점에 대한 필자의 생각

메시와 호날두 등장 이전까지 펠레의 1279골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논란이 없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메시와 호날두의 등장 이후 현시대에 영웅들을 띄어주기 위함인 것인지, 767골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점점 언론들도 펠레의 득점을 767골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결국 FIFA까지 나서서 767골로 못을 박았다. 하지만 그 당시 펠레는 사회적 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공식전을 뛰었다. 근데 그때에는 현재의 친선 경기만큼의 무게감이 아닌 유일한 '큰 돈벌이'였기에 8, 9할은 서로 베스트 11로 경기했다. 이에 관련한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레알 마드리드와 산투스가 붙었을 때 레알 마드리드가 이겼었다. 근데 레알 마드리드는 자신들이 유럽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의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반면, 산투스는 2, 3일 간격으로 지속되는 월드 투어로 지친 상태였고 당장 2일 전에 경기를 한 상태였다. 이 정도로 이때에 친선경기에 무게감은 지금이랑은 차원이 달랐다. 이외에도 대서양컵, 리우-상파울루 대회 같은 여러 대회도 비공식전에 포함되어 있고, 무엇보다 펠레가 뛰던 시대에는 이 기록을 "인정"하였다. (밑 사진은 당시 1969년 동아일보에서 썼던 펠레의 1,000골 기사이다.) 그래서 비공식전에서의 펠레의 스탯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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